2024년 6월 12일,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이 86세의 나이로 숙환으로 별세했다. KAIST는 그의 기부와 헌신을 기리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1938년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에서 태어난 정문술 전 회장은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군 복무 중 5·16 혁명을 맞아 혁명군에서 인사와 총무를 담당했다. 이후 1962년 중앙정보부에 특채되었고, 원광대학교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하며 대학 생활을 병행했다.
1980년, 중정의 기조실 기획조정과장으로 있던 중 보안사로부터 해직되었다. 이후 사업을 준비하던 그는 퇴직금을 사기당했고, 어렵사리 설립한 풍전기공은 대기업의 견제에 문을 닫았다. 이 시기를 고인은 저서 '왜 벌써 절망합니까'에서 상세히 다뤘다. 가족 동반 자살을 고려할 만큼 힘들었던 시기였다.
1983년, 정문술 전 회장은 벤처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인 미래산업을 창업했다. 일본의 퇴역 엔지니어를 영입해 반도체 검사 장비를 국산화하며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반도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70년 중앙정보부 근무 시절 일본에서 산 도시바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IC'라는 글자에서 비롯되었다.
무인 검사 장비 개발로 한때 큰 위기를 겪었지만, 국산 반도체의 수출 호조로 인해 고속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반도체 장비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로 성공을 거둔 미래산업은 1999년 11월 국내 최초로 나스닥에 상장되었으며, 정문술 전 회장은 '벤처 1세대'로 불리게 되었다.
2001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정문술 전 회장은 KAIST에 300억원을 기부했다. 2013년에는 추가로 215억원을 기부하여 바이오·뇌공학과 및 문술미래전략대학원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개인의 고액 기부는 당시 국내 최초였다. KAIST 정문술 빌딩과 부인의 이름을 딴 양분순 빌딩도 이 시기에 건립되었다.
2013년 1월 10일, 정문술 전 회장은 기부금 약정식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며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부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문술 전 회장은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과 KAIST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2014년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태평양 자선가 48인'에 포함되었다.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받기도 했다.
정문술 전 회장은 두 아들과 세 딸이 있지만, 이들을 회사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할 만큼 가족과 회사 운영을 철저히 분리했다. 이는 그의 경영 철학과 기부 정신을 잘 보여준다.
정문술 전 회장의 별세로 많은 이들이 그의 기부 정신과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헌신을 기리며 애도를 표하고 있다. 그의 유산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