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12.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5번째 FIFA 월드컵. 1938년 프랑스 대회 이후 16년만에 유럽에서 개최된 월드컵이다. 개최지 결정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결정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FIFA 창설 50주년을 맞이하는 대회이니 FIFA의 본부가 있는 스위스에서 개최하자는 거였지만, 사실은 유럽 대륙 대부분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쑥대밭이 되어서 유럽 국가 중에 그나마 대회를 개최할 여력이 있는 나라는 2차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위스 뿐이었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개최한 것이다.
이 대회에서부터 최초로 TV 중계가 이루어졌으며,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16개국 체제가 고착화되었는데, 대신 기권팀이 3개국이나 되었던 지난 대회와 달리 이번에는 기권팀이 전무하여 진정한 의미의 16개국 체제가 완성되었다. 사실상 현대 월드컵의 시조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대회부터 패전국인 서독과 동독, 일본의 출전금지가 해제되었다.
26경기에서 총 140골이 쏟아져 나와 경기당 5.38골을 기록한 다득점 대회로 기록되었다. 월드컵 역대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인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7:5 경기도 이 대회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공격축구가 찬란히 만개했던 대회. 특히 매직 마자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헝가리는 한국을 9:0으로 개발살내는 등 5경기에서 27득점을 기록하는 흠좀무스러운 공격력을 과시했다.
또한 스위스는 이 대회에서 무려 10실점을 헌납하면서 개최국 최다 실점 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60년간 이어져오다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회에서 개최국 브라질이 통일한 독일에게 1:7로 완패하는 등 한 대회에서 14실점을 허용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이 독립한 아시아 주권국가중에서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기념비같은 대회였으며, 그 후 1986 멕시코 월드컵 대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본선 진출을 한 대회였다.
개최국 스위스와 전대회 우승국 우루과이가 자동진출권을 확보하고 나머지 14개 티켓을 두고 총 37개의 참여국을 13개 조로 나누어 각조 1위에게 본선 진출권을 부여했다. 다만, 영국 홈네이션만으로 구성된 3조는 FIFA의 우대정책이 계속되어 조 2위도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주권 국가로서는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라는 영예를 안고 출전했으나, 1차전에서 헝가리를 만나 0:9로 대패하고 만다. 결과만 놓고 보면 졸전을 치렀거나 아시아와 세계의 축구 수준 차이를 실감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대한민국이 헝가리를 상대로 0:9로 끝낸 것은 예상 밖으로 엄청나게 선전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조인한 지 11개월 만의 일이었으니까. 실력 차이도 있었지만 밑에 후술할 내용처럼 당시 안 그래도 약한 팀이 컨디션이나 상황이 최악인 상태에서 대회를 출전 했기에 훨씬 더 큰 점수차가 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우선 이 당시 헝가리 대표팀의 전력부터 살펴보면, 절대 현재와 같은 유럽 중하위권의 평범한 전력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축구 종주국이자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던 잉글랜드조차도 대회 직전의 평가전에서 헝가리에 1:7로 압살당했던 데다가, 당장 이 월드컵 대회 조별예선에서 같은 조에 속해있던 팀이자 대회 우승국인 서독도 헝가리를 상대로 예선 1위를 하는 건 손해라 판단하고 2군들을 내보내 3:8로 참패했다. 게다가 헝가리는 팀의 핵심멤버인 푸스카스가 부상으로 결장했음에도 토너먼트 8강전에서 브라질과 4강전에서 우루과이를 상대로 각각 4골씩 때려박으며 4:2로 손쉽게 제압하고 결승까지 올랐다. 즉 이 당시 헝가리 대표팀의 전력은 가히 세계 최강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으니, 애초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전력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으며, 비교 자체를 불허했다.
또한, 이 경기에서 대한민국의 골문을 지켰던 홍덕영 골키퍼는 혼신의 힘으로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 공세를 수 차례 막아내는 눈부신 활약을 펼쳤는데, 경기가 끝나고 일부 관중들이 이러한 활약에 감동하여 사인도 받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홍덕영은 이날 경기에 대해 "푸스카스의 슛은 정말 강해서 위잉 소리가 났고,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라고 훗날 회고한 바 있다. 게다가 어찌나 힘들었던지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공을 잡으면 고의로 밖으로 차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공을 밖으로 차낸 경우 다시 가져올 때까지 경기를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해외 언론은 헝가리의 20:0 대승 또는 그 이상을 예상한 곳도 많았다. 심지어 당시 기록영상만 봐도 외국기자들이 경기 도중 대놓고 드러누워 잘 정도였다. '취재할 거 있어? 아주 학살당하겠지. 깨면 취재나 하자고.'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되려 나중에 "겨우 9:0으로 이겼어?"라며 크게 놀랐다고 한다.
쉽게 말해 지금 상황으로 비유하면 남수단이나 소말리아 같은 내전에 시달리는 세계 최빈국의 축구 국가대표팀이 프랑스나 브라질 같이 내로라하는 세계적 축구 강국들을 상대로 0:2, 0:3 정도의 점수차로 진 셈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생뚱맞을 수도 있겠지만, 2010년대 초반에 브라질이 탄자니아와 친선 경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브라질이 탄자니아를 5:1로 이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브라질에 대해서 평가하는 게 아니라 탄자니아가 브라질 상대로 골을 넣었다며 감탄했다.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올림픽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대한민국에게 8:0, 독일에게 10:0으로 대파당했던 피지가 멕시코와 붙을 때 멕시코가 5:1로 이긴 경우도 있다.
즉 이게 꼭 한국을 흉볼 이야기는 아님에도, 당시 월드컵 본선에 아시아나 아프리카가 참가하여 유럽과 남미 참가국이 줄어든다는 우려의 의견을 표하던 이들이 그 명분으로 삼았던 일도 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6.25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도 급급한 상황이라 스포츠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시대가 시대여서 이런 상황에 대표팀에 대한 지원이 넉넉할 리는 없었고, 되려 일본과의 최종예선에선 대통령의 반대로 홈 경기마저 치르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이승만이 일본 팀이 한국 땅을 밟는 것을 반대해 버린 것.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전설적인 어록이 있는데,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현해탄에 빠져 죽어라." 발언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악재를 극복하고 기어이 일본을 꺾고서 본선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거기에 당시 대한민국은 여권 발급과정이 더럽게 복잡해서 이것만으로도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행정력에서도 굉장히 미숙했는데 단복조차 맞추지 못해 임원이 아는 집에서 외상으로 빌려 입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질조차 좋지 못해 금세 닳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대표팀은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조차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일단 미군의 수송기를 얻어타고 무작정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선이 발달해 있던 일본의 도쿄 국제공항으로 간 다음에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야 간신히 일본 도쿄 - 태국 방콕 - 인도 콜카타 - 파키스탄 카라치 - 이탈리아 로마 - 스위스 취리히로 이어지는, 80일간의 세계일주 뺨칠 정도로 괴랄한 노선의 장거리 비행을 해야 했다. 그나마도 티켓이 모자라서 날짜조차 못 맞출 뻔했는데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왔던 영국인 신혼부부가 이들의 사연을 접하고는 월드컵인데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며 딱하게 여겨 자신들의 비행기 티켓을 양보한 덕에 1진이 먼저 출발해서 경기 날짜만 간신히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2진은 뒤늦게 구한 에어 프랑스의 항공편을 통해 스위스에 도착했다.
이 때문에 한국 대표팀은 본선에 진출하고도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다른 팀들이 전부다 개막 한 달 전부터 모여서 현지 적응 훈련하고 뭐하고 할 때는 물론 월드컵이 개막된 이후에도 스위스에 도착하지 못했고, 그렇게 대한민국 대표팀이 스위스에 도착한 것은 경기 이틀 전 오후 10시였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스위스에 도착해서 숙소를 쉽게 찾아갈 리도 없었고, 그렇게 간신히 숙소를 찾아가고 나서도 당시 대표팀에는 주무고 뭐고 없었으니 경기 하루 전날인데도 선수들이 직접 유니폼 바느질을 한다거나 축구화 손질을 한다거나 하면서 밤새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한국 대표팀은 시차적응이나 피로회복은 고사하고 온갖 고생만 잔뜩 한 끝에 거의 유니폼만 갈아입는 수준으로 준비를 마치고 바로 세계최강 헝가리를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를 회고한 축구 원로들은 후반전에 다리가 풀리고 쥐가 나는 와중에도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90분을 뛰었다고 밝힌 바 있다. 게다가 당시 한국 대표팀은 딱 11명에 맞춰 1진만 온데다가 당시엔 골키퍼를 제외하면 선수교체 규정조차 없어서 쥐가 나거나 탈진해서 쓰러진 4명이 나간 뒤에는 7명만 뛰어야 했다. 이런 눈물겨운 투혼 때문에 이 날의 승장이었던 헝가리의 구스타프 세베슈(Gusztáv Sebes, 1906~1986) 감독 또한 "한국 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 쓰러져도 계속 일어나 뛰었다."라고 칭찬했다.
그 때문에 월드컵을 관전하러 온 세계의 축구팬들에게 한국은 그저 구색이나 맞추기 위해 출전한 들러리로 평가되던 초반의 시선을 떨쳐내고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월드컵 본선까지 올라온 위대한 불굴의 팀으로 각인되었다. 실제로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유럽 방송국의 해설자들 또한 “한국 대표팀은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라의 선수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분들께서 이들에게 응원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을 남겼고, 한국 팀의 이런 내막을 알게 된 유럽의 축구팬들은 갑자기 한국팀 선수들의 숙소에 들이닥쳐서 점퍼, 청바지, 소시지, 통조림, 현금, 손목시계 등등 각자 갖고 있는 물건들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돌아갔다. 특히 헝가리전에서 전설로 남아있는 선방쇼를 선보였던 홍덕영 골키퍼에게는 현지인들이 사인도 받아갔다고 한다. 이런 유럽인들의 대인배적인 사랑 앞에 당시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쉽게 말해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그들이 거둔 성적과 상관없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참가한 난민 대표팀 선수들에게 전세계가 표한 것과 같은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헝가리전에서의 대패로 인해 분위기도 가라앉은 데다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진을 다 뺀 한국은, 뒤늦게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한 2진 선수들을 주축으로 이후 2차전 터키와의 경기를 치렀으나 역시 매우 무기력한 경기를 펼쳤고, 결국 0:7로 대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그 당시 대한민국 선수단은 월드컵 경기 입장료의 일정액을 출전국에 분배하는 사실조차 몰랐다. 스위스 월드컵 조직위는 터키와의 경기가 끝난 뒤 대한민국 선수단이 묵었던 호텔로 '경기배당금 8,400달러를 받아가라'고 통보했으나, 대한민국 선수단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까지 온 과정도 매우 험난했기에, 귀국도 서두르기 위해 이미 스위스를 떠난 뒤였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김용식 감독은, 대진운만 보고도 이미 대한민국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는 그 유명한 말로 선수들과 전의를 다지고 경기에 임했지만, 그 한 골을 넣기에도 세계와의 격차가 너무도 컸고, 조 추첨 운도 너무 없었으며, 열악한 조건 탓에 스위스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제대로 경기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기에 끝내 그 소박한 목표조차 이루지는 못했다.
이러한 시련을 겪었던 대한민국 대표팀이 시간이 흘러 1986월드컵 우승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월드컵 첫 골을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위를 달성하고, 토고를 상대로 원정 첫 승에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원정 16강 15위까지 달성한 것과 이 대회 우승팀 독일까지 이긴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와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 사이에 있었던 한국의 놀라운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별 예선의 특이한 진행 방식 때문에 대한민국 대표팀은 서독과 같은 조에 속했음에도 경기를 치르지 않았다. 독일과의 첫 대결은 이로부터 4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대신 그때부터 이뤄진 독일과의 대결은 전적으로 독일이 우세(3전 2승 1패. 한국은 3전 2승 1패)였으나 막상 독일이 대한민국을 쉽게 이기지는 못했다.
다만, 여기서 헝가리의 유효 슈팅이 100여개에 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축구를 조금만 본 사람이라도 알겠지만, 전혀 현실성이 없는 헛소문이다. 최근에 밝혀진 축구 인플레이 시간은 60분인데 그냥 슈팅도 아니고 유효 슈팅을 36초마다 1개 이상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가 되며, 아무리 경이적인 체력과 선방 능력을 가진 골키퍼라도 두 자리 수 실점을 안 하는 게 이상한 상황이다.
실제 사례를 꺼내자면, 축구 역사상 최다 점수 차 경기가 149:0인데, 이는 선수들이 쉬지 않고 자책골을 만들어서 세운 기록이다. 즉, 선수들이 경쟁조차 안 하는 상태에서 자책골까지 퍼부을 정도로 작정해야 100개 이상의 유효 슛이 나올 수 있다.
한국 축구에서 가장 비극적인 경기들로 비교하자면, 1948 런던 올림픽 스웨덴전 0:12 패배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네덜란드전 0:5 패배를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최다 점수 차 패배인 스웨덴전도 전체 슈팅 수는 48개에 불과했으며, 유효 슈팅 수로 본다면 그 이하로 판단해야 한다. 거기다 이 경기를 맡은 골키퍼도 다름 아닌 헝가리전의 수문장 홍덕영 선수였다. 네덜란드전에서 우리나라가 맞이한 전체 슈팅 수는 27개, 그 중 유효 슈팅 수는 17개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전의 골키퍼 김병지는 17개의 유효 슈팅 중 5개를 허용했는데, 이는 역대 우리나라 골키퍼 중 최고의 퍼포먼스로 현재도 찬사를 받고 있다. 참고로 네덜란드전도 상대 유효 슈팅 수를 과장한 날조가 마찬가지로 돌고 있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SBS의 유튜브 스포츠 채널인 스포츠머그가 영상에 고스란히 보도한 적까지 있다.
대회 포스터 중에 태극기가 완전히 가려진 것도 있다. 당시 안습했던 한국의 국가 인지도를 느끼게 해 준다.
당시, 한국이 대패를 하자 유럽강호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나라들은 실력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이런 수준 안 되는 나라들이 월드컵에 나와 격을 떨어뜨려서 되겠느냐"라고 주장하자 쥘 리메 회장은 "한국같은 약체라도 그 대륙에서 예선을 거쳐 올라온 만큼, 나올 값어치는 있다. 지금은 한국이 무너졌다 해도 모르는 일이다. 강자만의 대회가 아니다."라면서 일축하였다.
7골 이상 나온 경기들이 꽤 많았다. 이것 때문에 역대 최다 골 대회가 되었다.
헝가리 9 : 0 대한민국 (9골)
터키 7 : 0 대한민국 (7골)
헝가리 8 : 3 서독 (11골)
서독 7 : 2 터키 (9골)
우루과이 7 : 0 스코틀랜드 (7골)
잉글랜드 4 : 4 벨기에 (8골)
오스트리아 7 : 5 스위스 (12골)
서독 6 : 1 오스트리아 (7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