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31.
2009년 6월 16일 오전 6시 45분, 아일랜드 북서부 슬라이고(Sligo) 시 근처 로스즈 포인트 해변(Rosses Point Beach)에서 아서 킨셀라(Arthur Kinsella)라는 남성이 아들 브라이언과 함께 철인 3종 경기를 연습하다가, 해변에 웬 남자가 나체로 누운 모습을 발견하여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피살자는 물에 빠진 듯했는데, 아서 킨셀라 부자가 신고하여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그날 오전 8시 10분, 발레리 맥고완(Valerie McGowan) 박사가 이 남자가 공식적으로 사망했다고 공표했다.
죽은 남자는 체구가 가냘프고 짧은 회색 머리를 했으며 연령대는 50대 후반~60대 초반으로 보였다. 1949~54년생으로 추정되고 키는 179cm 정도였으며 벽안이었으며 피부는 햇빛에 잘 그을렸다. 죽은 남자를 본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피살자는 독일계처럼 보였으며 독일어 억양이 강한 영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옷차림은 깔끔했으며 얼굴도 단정하게 면도했고 머리 역시 잘 빗질된 상태였다.
현장 주변에 변사자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가죽 재킷과 청바지, 파란 양말, 검은 가죽 벨트와 검정 구두가 발견됐다. 의상은 C&A 제품이었는데 유럽의 유명한 패션 소매상이었다. C&A 매장은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었다. 사망자의 옷차림과 독일어 억양이 강한 영어를 구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망자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 남자의 외모로 볼 때 전문직 종사자로 추정되었다.
현장에는 이 독일계 남자의 신원을 알 만한 신분증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곧바로 신원을 수배하였다. 그리고 슬라이고(Sligo) 시 로스즈 포인트 해변 근교에 있는 슬라이고 시티 호텔 직원의 증언이 나왔다. 직원은 죽은 남자가 그 호텔에서 투숙했던 오스트리아 투숙객 피터 버그만(Peter Bergmann)이라고 말했다. 아일랜드 경찰 조직인 평화수호대는 피해자의 신원을 오스트리아인 피터 버그만으로 결론을 내리고 손쉽게 사건이 해결되는 듯했다.
그런데 조사 결과 피터 버그만이란 남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일랜드에 입국한 외국인의 기록을 조회한 결과, 피터 버그만이란 오스트리아인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 남자가 아일랜드에 입국했다는 기록도 없었다. 또 사망자가 슬라이고 시티 호텔에 체크인할 때 작성한 빈의 주소 또한 공터로 밝혀졌다. 즉, 아일랜드에 입국하지도 않은 사람이 버젓이 며칠 동안 아일랜드의 호텔을 이용한 뒤 해변가에서 죽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남성의 이름이 피터 버그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고, 평화수호대는 다시 이 남성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 주력해야 했다.
사건을 조사하던 아일랜드 경찰은 피터 버그만의 마지막 행적을 탐문해 정확한 신원과 사건 경위를 밝히려 했다. 확인 결과, 이 남자가 슬라이고에 도착한 때는 사망하기 나흘 전인 6월 12일이었다.
6월 12일 오후 2시 반에서 4시 사이에 '피터 버그만'은 아일랜드 데리(Derry)에 위치한 얼스터 버스 정류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슬라이고 역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해 검정색 숄더 백과 여행가방을 함께 실었다. 슬라이고 역에 도착한 때는 6월 12일 저녁 6시 28분. 뒤이어 피터 버그만은 택시를 잡아 슬라이고 시티 호텔로 향했고 65유로를 지불했다. 슬라이고 시티 호텔에서 피터 버그만이라는 가명을 대고 체크인하고, 주소를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어딘가라고 거짓으로 적었다.
6월 13일 피터 버그만이 오전 10시 49분에 우체국으로 가는 모습과 82센트짜리 우표 8장과 항공 우편 송장을 사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피터 버그만이 마지막으로 연인에게 편지를 보냈거나, 혹은 자기 물건을 보내려 한 것으로 보이는데, 누구에게 우편을 보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6월 14일,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피터 버그만은 슬라이고 시티 호텔을 떠나 택시를 잡고, 운전기사에게 수영하기 좋은 조용한 해변이 있으면 거기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기사는 로스즈 포인트 해변을 추천하고 그곳으로 피터 버그만을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또 피터 버그만이 돌아올 때에도 같은 택시를 이용했으며 슬라이고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주었다고 한다.
6월 15일 오후 1시 6분에 피터 버그만은 슬라이고 시티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방 열쇠를 반납했다. 그리고 검정 숄더백과 보라색 비닐봉투, 검은색 여행가방을 들고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피터가 처음 슬라이고에 도착했을 때에도 검은색 여행가방이 있긴 했지만 다른 가방이었다. 즉 체크인할 때 있던 검은색 여행가방 A가 어느 사이엔가 바뀌어 체크아웃할 때에는 검은색 여행가방 B가 된 것이다.
체크아웃을 한 후 피터 버그만은 퀘이 스트리트와 와인 스트리트를 거쳐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갔고, 퀘이사이드 쇼핑센터에서 멈춰서 출입구에서 몇 분 동안 누군가를 기다렸다고 한다. 1시 16분에 퀘이사이드 쇼핑센터를 떠난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여전히 가방 3개를 지니고) 와인 스트리트를 따라 걸어갔다. 1시 38분에 버스 정류장에서 햄과 치즈가 든 샌드위치와 카푸치노 한 잔을 사 먹었다. 피터는 음식을 먹는 동안 주머니에 있던 종이 몇 장을 꺼내 읽었으며 다 읽은 뒤 종이를 반으로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오후 2시 20분에 발차하는 로스즈 포인트 행 버스에 올라탔다.
6월 16일, 피터 버그만이라 불리는 이 의문의 남성은 해변에서 나체 시신으로 발견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외에는 별 다른 정보를 얻지 못해 피터 버그만의 진짜 정체를 파악하는 덴 실패하였다.
'피터 버그만'의 사체는 로스즈 포인트 해변에서 알몸 상태로 발견되었고, 주변 해안을 따라 옷가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발견지 주변에선 지갑이나, 현금, 신분증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인은 익사로 발견되었지만 살해당했다고 볼 만한 외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남자의 치아 상태는 좋은 편이었으나, 근관 수술을 받은 흔적과 상한 치아를 덮어씌운 수술을 받은 흔적이 있었고 금니를 박거나 잇몸에 은 필링을 받았으므로 치과치료를 자주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겉모습과 달리 건강은 매우 허약하다고 드러났다. 키가 179 cm인데도 불구하고 몸집이 왜소했고, 전립선암 말기에, 암이 전이된 듯 보이는 골종양 증세까지 있었다. 심장은 이전에 심근경색을 앓은 흔적이 발견됐고 콩팥도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피터의 장기 어디에서도 치료제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고, 심지어 상당히 자주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CCTV에 잡혔다. 이 정도 건강상태였으면 담배는커녕 약을 밥 삼아서 먹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사건을 수사하던 아일랜드 경찰에겐 또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바로 피터 버그만이 들고 온 보라색 비닐봉투였다. 피터가 슬라이고 시티 호텔에 머무는 동안 촬영된 CCTV에는 도구나 소지품으로 가득 찬 보라색 비닐봉투를 들고 떠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왔을 땐 그 보라색 비닐봉투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일랜드 경찰은 변사자가 행동이 매우 철저하고 꼼꼼한 편이었으므로, 피터가 숨긴 개인소지품을 찾아낸다면 정체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이 봉투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아일랜드 경찰은 5개월 동안 이 사건을 수사했지만 결국 '피터 버그만'의 진짜 신원을 밝혀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의문의 남자는 결국 자기가 죽은 슬라이고에 쓸쓸하게 묻히고 말았다. 피터 버그만이란 가명으로 아일랜드에 나타난 이 남자의 진짜 신원은 밝혀지지 않은 채 미제 사건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2015년에 프랑스의 언론사인 르 몽드에서 이 사건에 대해 오스트리아 경찰 측과 접촉하여 확인한 결과 아일랜드 경찰 측에선 단 한 번도 이 사건과 관련해 오스트리아에 통보하거나 외교당국과 접촉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르몽드는 페터 베르크만의 시신이 발견된 후에 인터폴의 '실종자' 혹은 '신원 수배' 이 2가지 범주 어디에도 보고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언론 보도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결국 페터 베르크만을 실종자로 보고하는 것은 전적으로 출신 국가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5개월 동안 수사를 하며 피터 버그만의 신원을 밝히려고 노력했다는 아일랜드 경찰이 왜 이렇게 행동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