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인도교 폭파, 서울 시민의 발 묶인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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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인도교 폭파, 서울 시민의 발 묶인 그날


2024. 6. 28.

폭파된 한강 인도교 아래 임시 다리를 건너는 피난민들.

 

1950년 6월 28일, 한국전쟁 발발 나흘째, 서울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 날은 대한민국 국군이 미아리-회기동 일대의 방어선을 잃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날로, 서울이 북한 인민군에 의해 함락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떠난 상태였으며, 전날 새벽 2시 서울시민에게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하면서도 이미 대전으로 가는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같은 날 새벽 4시, 비상 국무회의를 열고 수원으로의 천도를 공식적으로 의결했다.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에서 큰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았다. 이 폭파로 인해 군인과 경찰, 민간인 등 500~8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서울에 남아있던 100만 시민의 발이 묶였다. 이는 북한 인민군과 전차대의 남하를 막기 위한 국군의 결정이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서울에 남은 시민들은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같은 해 9월 28일까지 북한의 통치를 견뎌야 했다. 많은 시민들이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아 부모, 형제, 자매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사람들은 국군 공병대 소속 장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정은 고뇌로 가득 찼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지만 자국민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을 반가울 리 없었기 때문이다. 폭파에 대한 책임 소재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공병감이었던 최창식 대령은 폭파 후 적전비행죄로 체포되어 사형이 집행되었지만, 이후 무죄 판결을 받아 사후 복권됐다.

 

폭파 명령에 대한 논란 중에는 미군 장교가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최 대령의 재심 과정에서 미군 크로포드 소령은 폭파 명령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가 내렸다고 증언했다. 지휘계통상 채 장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은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로, 그는 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폭파된 한강 인도교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4년 후인 1957년 11월 30일 미군과 국군이 배다리를 가설해 1개 차선만 임시 복구되었다. 완전 복구는 이듬해 5월 15일에 이뤄졌으며, 이날 개통식이 열렸다. 이후 1962년 제2한강교가 건설되면서 제1한강교로 불리다가, 1984년 현재의 명칭인 한강대교로 확정됐다. 오늘날의 한강대교는 1982년 2월 기존 4차선에서 8차선으로 확장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68년경 제1 한강교(현 한강대교)와 노들섬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