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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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


2021. 6. 10.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조선 말 10대 부자 안에 들던 집안의 6형제 중 넷째. 바로 아래 동생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이회영의 며느리는 고종의 하나밖에 없는 누님의 외동딸로 고종의 조카딸이다. 또한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누이 동생을 친정으로 불러들인 뒤 급사했다고 속이고 개가시키기도 했다. 조선 시대 여성의 덕목은 부군에 대한 절개이고 반가의 규수라면 이러한 잣대는 더욱 엄격했다. 하물며 명문가 중 명문가였던 우당 선생의 가문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폐풍이라고 여기고 실제로 행동했던 선생의 선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대한제국 때 애국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신민회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훗날 만주 독립 기지 건설과 연관이 된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6형제 모두가 조선 안의 명성을 포기하고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집안의 부를 보여 주는 일화가 전 재산을 급처했더니 당시 소 13,000마리 값이다. 당시 40만원이었으며 현재 시세로 환산했을 때 600억원 정도이다. 소 값이 현재와 과거에 비해 평가절하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이 값은 2조원에 달했을 것이다. 또한 물가 상승을 제외하더라도 한국이 당시에는 전 세계에서 돈이 많은 나라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적은 나라였음을 감안한다면 상상 이상의 돈이다. 이는 다시 말하지만 급히 처분한 재산이었고 다 팔지도 못하고 일부는 버리고 갔다. 이후 현지의 한인 단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건립에 참여했고 국내, 연해주, 상하이 등의 독립운동 조직에도 다수 참여했으며 고종의 망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서간도 지역 한인 단체는 사실상 이회영 일가의 재력으로 유지된 셈.

대개 무장 투쟁파들이 그렇듯 초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내부 분열시 조정 역을 맡은 적도 있으나 1921년 노선 불만의 문제로 합류하였다. 이후 만인의 자유와 권리를 외치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남화 연맹 등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체를 결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이회영 자신은 임시정부 수립을 처음부터 회의적으로 봤다. 그 까닭은 임시정부 같은 조직이 있으면 대통령이니 국무총리니 하면서 지위를 놓고 독립운동가들이 감투 싸움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결국 사실이 되어 버렸다. 1920년대 후반부터 아나키즘 활동을 본격화하였으며 백정기 등과 함께 항일구국연맹, 흑색공포단 등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만주 지역의 독립군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김좌진과 면담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며 반응은 좋지 않게 보는 편이었다고 한다. 1932년 만주에서 활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회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국 다롄 지역에 거점을 만들려 했으나 밀정들이 이회영이 다롄에 온다는 사실을 미리 일본 영사관에 알려서 체포당했고 결국 4일만에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이후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1913~2005)이 아버지를 죽게 한 밀정들을 추적한 끝에 이규서와 연충열이라는 사람들이 이회영이 다롄으로 간다는 사실을 밀고한 밀정들임을 밝혀냈다. 하필이면 이규서는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의 차남이었던지라 이규창 입장에서는 사촌지간이었고 이석영의 장남은 10대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지라 이석영에게는 남은 혈육이 이규서뿐이었다. 그러나 이규창은 용서하지 않고 이규서와 연충열을 처단하였고 결국 이석영의 대는 끊기게 된다. 이회영의 재산은 독립운동 8년만에 바닥나 아들 이규창의 자서전에 따르면 "일주일에 3번 밥을 하면 운수가 대통"이라고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하니 국외 독립운동이란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 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졌다.




앞줄 오른편 말년의 이회영.

본래 이회영 일가는 조부가 이조판서를 지냈을 정도였기에 한일병합을 지지하거나 묵인할 경우 일제에게서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을 잘라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실로 엄청난 대인 집안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서구권에는 칼레의 여섯 시민이 있다면 한국에는 '이회영과 그의 여섯 형제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제인 둘째 이석영 선생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대 최고 갑부였던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마석) 모란공원묘원을 지나 서울양양고속도로 인근에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동대문부터 80리'라고 했는데 서울 나들이를 갈 때 '동대문에 당도해서야 남의 땅을 밞았다'고 했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중랑구 및 경기도 구리시, 남양주시 정도가 그의 땅이었을 것이다. 이석영 선생은 1934년 74세의 나이로 굶어 죽었다.

그와 그의 6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중 5명이 옥사하거나 아사하였다. 이회영 선생은 만주에서 항일에 대한 계획을 세운 뒤 다롄으로 이동하려다가 상하이 밀정에게 걸려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바로 아래 동생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부통령이 되는 성재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살아서 조국의 광복을 보고 귀국했다. 여동생인 경주 이씨는 해공 신익희의 형인 독립운동가 신재희에게 시집갔으며 이회영의 조카들도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달성 서씨와 1885년에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달성 서씨가 죽은 후 1908년에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하여 3남 4녀를 낳았다. 이은숙은 이회영이 사망했을 때 영전에 조사를 써서 올렸는데 내용이 절절하여 종종 회자되고는 하는 명문이며 광복 후 '서간도시종기'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 수기를 쓰기도 했다. 달성 서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이규학 역시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했는데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피난시키는 일을 맡았고 이후로도 충칭과 상하이를 오가며 연락 업무를 맡았다. 사후인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부인인 조계진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로 직접적인 의열 활동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비밀 연락 요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넷째 아들이 전 국회의원이자 김대중 정부 때 마지막 안기부장을 지낸 이종찬이다.

이회영의 자녀들 중 이은숙과의 사이에서 난 4남 이규창 역시 흑색공포단에 가담하여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상술한 대로 아버지를 일제에 밀고한 밀정인 사촌을 처단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제에 제공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밀정들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고 국내에 잠입해 밀정 이용로를 처단했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13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 안에서도 일제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몰래 만들어 배포하다가 발각되어 4년간 독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광복을 맞이해 석방되게 되며 공로로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이외에 차녀 이규숙의 남편인 장기준도 독립운동가였으며 이규창의 장인인 정이형은 정의부 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5남이자 막내 아들은 이규동으로 그의 장남이 변호사 겸 5선 국회의원인 이종걸이다.



2010년 <해방을 향해 쏘다, 자유인 이회영>이란 제목으로 이회영에 관한 특별 기획 드라마가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평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매회 마지막에 이회영에 대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소개가 짤막하게 나왔다. 특별 기획이라서 5부작으로 방영되었고 2010년 9월 12일 종영. 이회영 역에 배우 정동환이 분했고 배우 안재모가 일본인 기자 기무라 준페이 역을 맡았으며 권오중이 백정기 의사로 출연했다. 작품의 작가가 바로 정도전의 작가였던 정현민 작가로 작품이 데뷔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