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왕위에 오른 김씨 미추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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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왕위에 오른 김씨 미추 이사금


2023. 5. 2.


신라의 제13대 군주이자 기록상 최초로 등장한 김씨 이사금.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6대손이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김구도(仇道)의 아들이었다. 미추 외에도 다른 한자 표기로 '미조'(未照) 혹은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이칠 갈문왕(伊柒 葛文王)의 딸인 술례부인 박씨이다. 왕비는 조분 이사금(제11대)의 둘째딸인 광명부인 석씨인데 아무래도 박씨 시대에 석씨인 탈해 이사금(제4대)이 남해 차차웅(제2대)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처럼 석씨 왕실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라 초기는 전왕의 사위가 왕위에 오르는 사례가 많았고 신라에서 왕의 성씨가 달라지는 부분들은 대부분 사위 계승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첨해 이사금(제12대)이 정상적인 즉위 과정을 밟고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동안 혼란스러웠을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기》를 통해 이러한 혼란상을 추측할 수 있다. 즉위 원년에 용의 출현과 금성에 큰 불이 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보통은 신라에서 왕이 즉위하자마자 먼저 하는 국조묘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재위 2년째에야 했기도 하고, 아버지 김구도를 대원군 격인 갈문왕에 봉한 것도 2년차에 했던 점 등이 바로 그것이라 볼 수 있다.

기록에서 미추 이사금의 딸이 두 명 나온다. 즉, 내물 마립간(제17대)의 왕비 보반부인과 실성 마립간(제18대)의 왕비 아류부인이다. 《삼국사기》기록상 연대를 실제로 믿으면 미추 이사금의 딸로 도저히 볼 수가 없으나, 《삼국사기》는 신라의 건국 연대를 고구려보다 앞당기려고 의도적으로 당긴 의도가 역력함이 분명하되 계보도 자체는 실제로 개연성이 맞음이 상당부분 확인되고 있으므로 실제로 딸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바꿔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각각 따로 재위했다고 알려진 신라 초창기 임금들이 실제로는 재위기가 겹칠 가능성이다. 일반적으로 보반부인이 장녀, 아류부인이 차녀로 알려져 있다.


여러 금석문에 등장하는 신라의 태조 성한왕을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훗날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 들여온 유교식 5묘제를 실시하면서 김씨 왕계의 시조격으로서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미추 이사금은 백성들을 돕기 위한 정책들을 펼쳤는데 늙고 가난한 사람들을 진휼하고, 신하들이 궁전을 고치자고 했으나 백성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또한 백성들이 생계의 근본인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농사에 방해가 되는 다른 일들을 일체 없애버렸으며 지방 영토를 순방하며 백성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대내적으로 선왕인 첨해 이사금 대에 설치한 남당에서 정무를 보았고 아버지 김구도를 갈문왕에 봉했으며 시조묘(나정)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전왕들이 그래왔듯 백제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고 되어 있다. 대체로 백제가 먼저 공격을 하는 구도였는데 공격이 들어오는 족족 막아냈다고 한다. 《삼국사기》기록상 연대만으로 보면 백제와 신라가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기는 불가능했는데 고고학적으로 보면 아직 신라계 유물이 경상도 전역으로 퍼지지 못했고 미추 이사금 재위 기간과 동시대인 3세기 후반에 쓰여진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신라(사로국)는 여전히 진한의 여러 나라 중 하나 정도의 위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백제도 고고학적으로만 본다면 3세기 후반은 목지국을 막 제압은 했으되 여전히 목지국이 간접적으로나마 저항하면서 4세기 중반까지는 백제의 충청도 북부 일대 침투를 어렵게 했기에 3세기 후반 백제VS신라 간 전투는 어려운 상황이다. 《삼국사기》 서술을 믿는다면 미추 이사금이 신라 전체를 대표하는 군주로 재위했던 기간이 실제 연대보다는 후대에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석우로 열전>에 따르면 석우로가 선왕인 첨해 이사금 때 왜인들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당한 후 남겨진 석우로의 아내와 아들들이 왜인들에게 복수심을 품었고, 미추 이사금 시기에 왜국 대사가 신라에 와 있던 어느 날, 대사를 술에 취하게 만들고 불태워 죽여버림으로써 원수를 갚았지만 외교관을 살해한 것에 분노한 왜군이 다시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가 소득 없이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석우로 시기에 고구려와의 충돌이 있었고, 석우로가 대왜전, 대가야전과는 달리 유독 대고구려전에서 자주 패배해서 명망이 실추되었던 정황으로 보면 고구려 또한 3세기 후반에 신라와 전투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또다시 미추 이사금 대 사건이 3세기 후반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음에 무게가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