숀 리빙스턴의 끔찍한 무릎부상과 재기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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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리빙스턴의 끔찍한 무릎부상과 재기 그리고...


2023. 1. 22.



숀 리빙스턴은 미국의 前 농구 선수로 포지션은 가드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굉장한 촉망을 받았다. 리치우드 하이스쿨과 피오리아 센트럴 하이스쿨을 다니며 팀의 주축으로 활약해 학교랭킹을 더블에이로 평가 받을 만큼 이끌었다. 그리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일리노이 주 미스터 바스켓볼과 맥도날드 주관 올해의 하이스쿨 플레이어를 수상했다.

리빙스턴은 고등학교 졸업 후 듀크 대학교에게 제의받아 진학하기로 했으나 결정을 바꿔 곧바로 NBA 트라이 아웃을 신청하여 2004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4순위로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에 지명됐다.

선수시절 드래프트 후 크게 재능에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교체선수를 전전하며 데뷔후 두 시즌은 평균 6.8득점을 하고 다음시즌에는 소폭 향상된 9.3득점을 하였으나 무릎부상으로 아웃 당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리빙스턴에게 닥칠 진정한 시련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또 다음시즌 선수생활을 보내던 중, 2007년 2월 26일 선수 생명이 끝나버릴지도 모를 끔찍한 무릎 부상을 당했다.

당시 리빙스턴의 비명으로 스테이플스 센터 전체를 가득 메울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진단 결과는 리빙스턴의 비명 소리만큼 끔찍했다. 단순한 무릎 전방십자인대와 같은 부상이 아니라 사실상 무릎의 모든 인대, 관절, 근육까지 한 마디로 무릎 하나가 완전히 불구되는 수준의 부상이었다. 시즌 아웃은 당연한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선수생명은 고사하고 일상생활조차 장애를 감수해야할 정도의 끔찍한 부상이었다. 오죽했으면 의료진이 당시 절단까지 고려했다고. 이후 1년을 병상에서 지내고 6개월간 재활을 받았다. 여담으로 리빙스턴은 아직도 본인의 부상영상을 못본다고 한다.

재활에 매진해 기적적으로 2008년 복귀에는 성공했으나, 2009년에는 D리그까지 내려가는 등 NBA 선수로서의 경력을 마감할 위기에 몰리는 등 고생을 했다. 이 후 여러팀을 전전하다 2012-13시즌에 브루클린 네츠와 계약해 당시 감독이었던 제이슨 키드에게 두 가드 포지션을 해내는 다양성 평가를 인정받아 76경기를 뛰며 그 가운데 54경기를 선발로 출전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기여했다.

2014-15시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3년 계약을 맺고 입단해 스티브 커 감독의 관리하에 부활에 성공하면서 로테이션 멤버로 알토란같은 활약으로 이적 후 처음으로 우승반지를 얻었다.

2015-16시즌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파이널 1차전에선 20점 이상 0턴오버를 기록한 역대 6번째 선수가 되었다(횟수로는 7번. 유일하게 2번을 기록한 분은 역시나 마이클 조던.) 정규시즌에서도 클리블랜드 전에서 강했으니만큼 파이널에서도 계속 좋은 활약이 기대되었으나 클리블랜드의 터란 루 감독이 백전노장 리처드 제퍼슨에게 리빙스턴의 수비를 맡기며 1차전만큼의 빛나는 활약을 펼치긴 힘들었고, 결국 팀은 시리즈 스코어 3:1 상황에서 역전패를 당하며 아쉽게 우승에는 실패했다.

2017-18시즌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파이널에서는 저베일 맥기와 더불어 벤치에서 고효율로 제 역할을 하며, 팀의 파이널 우승에 일조하였다. 1차전 10득점 (야투 4/4, FT 2/2), 2차전 10득점 (야투 5/5), 3차전 8득점 (야투 4/5), 4차전 2득점 (야투 0/1, FT 2/2)로 엄청난 득점효율을 보여주었으며,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벤치 대결에서 압승을 거두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2018-19시즌 결국 샐러리캡을 비우기 위해 방출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본인 의사는 선수생활 연장을 목표로 했었는데 나이와 부상누적 여부때문에 새 팀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결국 2019년 9월 13일, 15년의 커리어를 뒤로 한 채 은퇴를 선언했다. 데뷔 직후 당한 끔찍한 부상을 생각하면 리빙스턴의 커리어는 가히 기적, 인간승리라고 평할 수 있었다.

2020년 9월 15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