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월 23일 오후 1시 34분경 승객 55명과 승무원 5명을 태운 속초공항 발 김포국제공항 행 대한항공 소속 포커 27이 홍천 상공에서 하이재킹당해 납북될뻔한 사건이다.
1958년 2월 16일 대한 국민항공사 시절 창랑호 납북 사건과 1969년 12월 11일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으로 인하여 정부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로 보안검색의 강화, 승객의 익명 및 타인 명의의 사용 금지, 비행장 직원에게 사법권 부여, 무장한 항공보안관 을 탑승, 조종사에게 권총 지급, 조종실 문을 반드시 잠그도록 규정하는 등 조치를 취했다.
납치범인 김상태는 22세 무직으로,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거진3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왜 여객기를 납치했는지는 그가 사살되었기 때문에 불명이나, 추측으로는 납북에 성공한 공작원들이 북한에서 엄청난 대접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사건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와 군, 경찰이 김상태의 집을 수색했으나, 간첩은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으며, 북한의 대남도발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보안검색이 이전의 납북 사건 때보다는 강화되긴 했지만 불행히도 범인인 김상태는 폭탄을 무사히 통과시켜 대한항공 포커 27여객기에 탑승했다.
오후 1시 7분, 폭탄으로 무장한 김상태와 54명의 승객, 그리고 승무원 5명과 함께 포커 27 여객기는 속초공항을 이륙했다.
이륙 후 27분이 지난 1시 34분, 홍천 1만 피트(3,048m) 상공에서 폭탄 2개가 폭발했다. 이 폭발로 기체에 20cm 가량의 큰 구멍이 나고, 이륙할 때 잠가 놓았던 조종실 문이 부숴져 버렸다. 최천일 씨는 폭발 지점에서 불과 50cm 떨어져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조종실 문이 부서지자, 김상태는 남은 폭탄 2개를 들고 조종사들에게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나온 놈이다. 북으로 기수를 돌려라!" 라고 강요했다.
이강흔 기장은 일단 납치범의 협박에 순응하는척하며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는 한편 강원도 고성군에 비상착륙 하기로 시도했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 해변에 낮게 접근하면서 '북한에 다왔다'며 랜딩기어를 내렸으나, 하필 고성군이 고향이던 김상태가 지금 착륙하는곳이 화진포임을 알아채고 "야 이 새끼야, 화진포인데 왜 내려, 그러면 정말 조종실에 이걸 던져!"라며 조종사를 협박했다. 조종사들은 할 수 없이 랜딩 기어를 올리고 계속 북으로 향했다.
폭탄이 터지자마자 이강흔 기장은 비행기가 납치됐다는 무전을 남겼다. 무전 내용은 "납치범이 탔다. 위치는 강릉 서쪽 30km 지점."
다행히도 이 무전은 관제센터와 속초공항 관제탑에 무사히 청취되었고 대한민국 공군은 납치소식을 전해듣고 연료와 무장을 만재한 F-5A 2대를 긴급출격 시켰다. 이 F-5 두 대는 15분만에 납치된 포커 27과 조우했다.
휴전선 이남 20km, 공군에서 발진시킨 F-5 2대는 기체가 더 이상 북쪽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해 납치된 여객기를 에워쌌다.객실에서 몰래 조종실과 인터폰을 하던 최석자 씨와 최천일 씨는 기지를 발휘해 승객들에게 범인을 속이기 위해 크게 통곡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함께 "북한 상공에 들어왔습니다, 이북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 가지고 있는 증명서를 모두 찢어 버리십시오"라는 거짓 기내 방송을 했다. 여기저기서 승객들이 통곡하자 최천일 씨는 승객들을 달래는 척 하며 김상태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여기에 이강흔 기장은 급하게 출격한 공군 F-5를 북한군 미그기가 마중나왔다고 속였다. F-5는 국군이 1968년에 도입한 전투기로, 정보를 찾아보기 어렵던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서 1971년까지도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외형의 신형 기종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김상태는 이 전투기가 대한민국 공군의 전투기라는 것을 모른 채 정말로 미그기라고 믿었다.
김상태가 F-5로 시선을 돌리자 항공 보안관 최천일 씨와 수습 조종사 전명세 씨가 즉시 권총을 뽑아 김상태를 저격했다. 김상태는 최천일 씨가 쏜 총알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제압당했지만 김상태가 갖고있던 폭탄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점화되고 말았다. 이에 전명세 씨가 바로 몸으로 폭탄을 덮었고, 폭발로 인한 피해는 최소화되었지만 전명세 씨는 왼팔과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김상태가 사살되고 이강흔 기장은 기체를 급강하해 이륙한지 1시간 11분이 지난 오후 2시 18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바닷가에 불시착했다. 속초에서 김포행 여객기였기 때문에 적은 연료만을 주유했지만 예비 연료가 있었고, 문서 위 사진에서 보이듯 양 주익이 다 뜯겨나갈 정도로 거친 착륙이었기에 폭발이나 화재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었으나 천만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가벼운 부상만 입었으나 폭탄을 몸으로 막았던 전명세 수습조종사를 비롯해 이강흔 기장, 객실승무원 최석자씨 등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전명세 조종사는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군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구급차를 이용해 서울로 후송되는 중에 "탑승객이 다칠까봐 몸을 던졌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과다출혈로 결국 사망했다.
폭탄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순직한 전명세 수습 조종사는 사후 정식 조종사로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일등 보국훈장과 조종사 정복을 받았다. 장례식 때 그가 당시 대한항공 전무이사 전명섭의 친동생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강흔 기장은 왼쪽 눈을 크게 다쳐 1.2 정도이던 시력이 0.3으로 나빠졌지만 치료 후 대한항공에 복귀하여 B727, DC-10, B747-200 등을 조종한 후 조종사로서 정년 퇴임했다.
이후 이 사건 승무원들의 이야기는 이념 선전이 강하던 1980년대 말까지 반공교육 때 널리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