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와 씨 없는 수박에 대한 잘못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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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박사와 씨 없는 수박에 대한 잘못된 정보


2023. 3. 4.

 

 

◆ 우장춘 박사

대한민국의 생물학자·농학자·원예학자로, 임호식에 이은 한국인 2호 농학 박사이다. 일본 도쿄 미나토구 태생이며, 1935년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을 통해 유채(B. napus)가 배추(B. campestris)와 양배추(B. oleracea)의 자연교잡종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세계 최초로 종의 합성과 종간 잡종에 관한 개념을 제시했으며(우장춘 삼각형 이론), 겹잎 페튜니아 육성, 배추와 양파의 일대 잡종을 육성하여 재배가 쉽고 농해 저항성에 강한 작물을 개발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생애

아버지는 당시 조선의 왕후 민씨를 시해한 사건인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조선인 우범선이며,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なか)다. 아버지가 1903년에 고영근[3]에게 암살되어 가세가 기울자 6살 때는 고아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후에 가정 상황이 나아지자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로 이사하여 구제중학교[4]까지 마친 후,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학비를 지원받으며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하였다.

실과는 제국대학에 부설된 구제전문학교 수준의 과정이다. 1919년 전국 대학의 단과대학이 학부로 개편됨에 따라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실과가 되었고, 1935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독립하여 도쿄고등농림학교가 되었다. 1944년 도쿄농림전문학교로 개칭하고, 1949년 신학제에 따라 도쿄농공대학 농학부가 되었다. 원래 우장춘은 교토제국대학 공학부에 진학하고 싶었기 때문에 구제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5] 농학부에 가야만 학비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농학부에 진학했다고 한다.[6]#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 입학했을 무렵 우장춘은 본인에게 한국의 혈통이 함께 흐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어느날,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 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한국인 유학생 김철수(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단상에 뛰어올라 "당장 이따위 연설을 멈춰라! 네놈이 그러고도 조선인이냐!"라고 일갈하며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대학 신입생이던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 김철수는 우장춘이 상술한 멱살잡이 사건에 대해 일본어로 묻자 "한국어도 모르는 녀석이 무슨 자격으로 여기 왔냐."고 다소 날선 반응을 보였는데 아버지가 조선인이라는 우장춘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좀 풀려 아버지의 성함을 물었고 당연히 우범선이란 이름을 들은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은 역적이고 매국노다! 네가 아버지가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것으로 봉사하며 살아야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 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준다. 그 이후 김철수와 우장춘 박사는 서로가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한다.

이후 1919년에 졸업하였고 농림성 산하 연구소에 취직하여 나팔꽃의 유전에 대해 연구하였다.

1924년에 일본인 와타나베 코하루(渡辺小春)와 결혼했다. 비하인드 스토리에 따르면, 모친 사카이 나카의 친구가 똑똑한 우장춘에게 자기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여 우장춘이 그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 친구의 고종사촌동생이 코하루였다. 두 사람은 집에서 당연히 자주 만났었을 테고, 결국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그런데 코하루 집안의 남자 어른들이 우장춘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결국 코하루는 집안과 의절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코하루는 3년 후,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명목상 양녀가 되어 스나가로 성씨를 바꾸고 우장춘은 그 일본인의 데릴사위로서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이름을 얻었다. 자녀들도 일본인으로 키우기로 하여 스나가 성을 사용했으나, 우장춘 본인은 계속 우씨 성을 사용했다. 그의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주의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단 이름은 그가 쓴 영어 논문에도 저자가 '우 나가하루(Nagaharu U)'로 나와 있어 서양에서는 다들 일본인으로 알고 있다.

1936년에는 아래에 언급하는 과학계에서 호평을 받은 논문을 발표로 도쿄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그의 공식적인 위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무려 16년 동안 기수(技手)라는 하위직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변적인 연구주제로 간주된 원예 분야만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1937년에 농사시험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이후 곧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타키이 종묘 회사에 연구원으로 입사하여 그곳에서 십자화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진력하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퇴사했다.

이후 4년 반을 실업자로 지내다가 1947년 한국에서 경남도 농림국장 김종의 주도로 일어난 우장춘 박사 환국 운동이 벌어져 1950년에 귀국하였다. 당시의 우장춘은 한국을 확고히 조국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애국심이 투철한 상태가 아니었고, 그의 가족이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으로 존재하고 있었다.[12] 따라서 우장춘 박사의 환국에는 우장춘 박사 환국 추진 위원회를 필두로 한 정부의 적극적인 우장춘에 대한 지원 약속이 꽤나 주요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우장춘 환국 추진 위원회가 결성된 이후, 이들은 일본인 소유의 농지를 불하받아 연구 부지를 마련하고 1949년에는 정부 지원을 받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후신이 지금의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다.

이 때 일본에서는 우장춘을 보내기가 아쉬워서 여러 수를 동원했으며 그를 감옥에 가두려는 꼼수까지 부리며 귀국을 말렸지만 우장춘은 한 발짝 앞서 자기 발로 조선인 강제수용소에 들어가 한국 정부에서 보내 준 한국인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송환선에 탑승하는 방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왜 대한민국이 우장춘을 그토록 원했냐 하면, 독립 후 대한민국은 농업 생산력이 부족해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필수적이었고, 우장춘과 같은 농학 인재는 대단히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 그래서 한국 정부는 100만 엔을 이적비로 우장춘에게 주었다. 현재로는 10억 원 정도의 가치다. 우장춘은 이 돈을 한국에 뿌릴 우량 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

이후 한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지내며, 6.25 전쟁 중엔 대한민국 해군 정훈장교로 임관해 소령으로 전역하기도 했다. 한국의 육종학과 농업의 발전에 기틀을 다졌다. 말이야 대우를 해 줬다고 하지만 열악한 한국 사정상 그야말로 자리만 내준 거고,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듯. 그나마 우장춘이 농림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농림부가 돈이 없다며 거절하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서 하소연했더니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을 불러 질책했다는 등 고생은 심해도 다행히 대우마저 엉망은 아니었던 듯 하다.

다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받고 일본으로 가기 위한 여권을 마련하기 위해 고생하면서 이승만에게도 발급을 도와달라고 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끝내 받지 못하고 임종 소식을 들어야 했던 악연도 있는데, 우 박사가 일본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대통령이 일부러 무시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결국 우 박사는 한국에서 상복을 입고 장례식도 어머니 시신 없이 한국에서 빈소를 차려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들어온 조의금으로 우물을 파고 여기에 어머니의 자애로운 젖이라는 뜻의 '자유천(慈乳泉)'이라 이름짓고 돌에 새겨진 글씨도 친필로 썼다.

대통령에 의해 농림부장관에 내정되었으나 거절하였고, 농가에 수익이 큰 벼와 감자, 무와 배추등을 개량하기도 했다. 또한 제주도, 거제도, 욕지도 등 남부 지역에서의 귤 재배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실제로 결과가 뛰어나 현재 감귤 산업이 바로 우장춘의 공로다.

1959년, 서울메디컬센터에 입원하여 십이지궤양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0일에 사망했다. 사망 몇 시간 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받았다. 병상의 우장춘 박사에게 문화포장 수여 사실과 함께 포장이 전달되자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사회장이 거행된 한국인이었다.

우장춘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었다.

그의 묘소는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구)농촌진흥청 뒷편에 있다.




 종의 합성이론

우장춘이 이룬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1935년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박사 학위 청구 논문을 통해 '종의 합성'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실험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그 동안은 카더라였던 종간 잡종의 매커니즘과 종의 합성이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밝혔다. 주요 배춧과 작물의 게놈 관계도가 삼각형의 관계를 이룬다고 하여 우장춘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생물체에서 다른 종 사이의 교잡은 교잡일 뿐이고 새로운 종이 될 수 없다는 그간의 과학계의 정설을 깨트리는 결과를 낳았으며 식물은 돌연변이가 아닌 종간 교잡을 통해서도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결국 '종의 분화는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였던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우장춘의 연구논문은 1935년 <일본 식물학 잡지>에 게재되었으며, 이듬해 이 연구성과를 주논문으로 하고 그간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을 부논문으로 하여 마침내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당 논문은 아직까지도 십자화과 식물(배추, 유채, 양배추)의 연구 논문이면 필수적으로 인용되는 논문이다. 한국인의 이름으로 알려진 과학 이론으로는 이휘소 박사의 이론과 쌍벽을 이루고, 아직까지 국외 과학 교과서에 사실상 유일무이한 이론의 창시자로 실린 인물이 바로 우장춘이다.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노벨생리학·의학상도 탈 수 있었을 지 모른다.







 겹꽃 페튜니아 육성

그가 본래 농림성 산하 연구소의 농장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연구하던 주제는 피튜니아였다. 당시 관상용으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던 페튜니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는데 홑꽃 페튜니아는 암술, 수술이 모두 정상인 반면, 겹꽃 페튜니아는 암술이 퇴화되어 종자 번식이 안되고, 꺾꽃이 등과 같은 방법으로 번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모두 각각의 단점이 존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장춘은 페튜니아의 교잡 연구를 통해 종자로 번식하는 절대 우성의 완전 겹꽃이 피는 종자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겹꽃 페튜니아 육성을 통해 인공적으로 화훼 품종을 만들 수 있음을 처음으로 증명한 연구였으며, 당시 겹꽃 페튜니아 종자의 가격이 같은 양의 백금의 가격과 같을 정도로 비싼 상황이었기 때문에 산업적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닌 연구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사카타종묘사는 겹꽃 페튜니아 신형 종자를 미국으로 수출하면서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훌륭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지만 1930년 농림성 산하 연구소 농장의 화재로 인해 농장에 두고 온 논문까지 불타는 바람에 모든 실험자료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당시의 애달픈 심정을 '세차게 타오르는 불 속으로 뛰어들려고까지 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주임으로 맡고 있었던 고노스 농장의 유채로 눈을 돌린 것이다.





 육종 연구

환국 이후의 우장춘은 오히려 학문적 연구가 아닌 실용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장춘 박사 본인도 논문 발표보다는 우량 품종의 개발에 집중했다. 우선 1950년부터 1955년까지 다년에 걸쳐 우리나라의 기존 품종으로부터 우수한 종자를 찾아내 자급자족할 수 있게끔 하는데 집중했으며, 1955년 이후에는 서로 다른 품종들 사이의 교잡 시험을 통해 우량 일대 잡종 종자를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일본산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한 결과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의 한국 토양에 맞는 배추를 개발하였고, 무, 고추, 양파 등과 같은 작물의 일대 잡종 품종이 1960년대 들어 잇달아 개발에 성공했다. 대표적으로 한여름철에도 평지에서 재배가 가능하게 된 평지여름무, 최초의 중간 잡종에 의한 다다기성 품종인 애호박, 당도가 높은 참외 신품종 금싸라기, 고랭지 여름배추 등의 우리나라 채소 산업의 전기를 마련한 여러 품종을 육성하는데 성공했다. 그 외에도 제주도에 감귤 농업을 제안하였다. 우장춘 박사는 피폐해진 한국 국토에 원예와 농업을 발전시켰고, 그 당시 열악했던 한국 농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맡았다.





 씨 없는 수박에 대한 잘못된 정보

대한민국에선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이 우장춘 박사라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명백히 잘못된 정보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제작한 대한뉴스 227호 〈우장춘 박사 서거〉에서도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을 만든 것으로 나올 정도.

실제로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교토대학 명예교수 키하라 히토시(木原均) 박사이며, 우장춘은 일반 국민들에게 육종학과 농업기술의 설명하고 개량종자의 생산성 향상과 그것이 초래할 식량증산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 씨 없는 수박과 그 종자를 최초로 한국으로 가져와 "새로운 농업기술을 배운다면 이렇게 신기한 수박도 만들 수 있습니다" 라고 가르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 게 전부이다. 당대 생명공학에 생소하고 일반적인 씨가 있는 수박만을 봐왔던 한국 청중들로선 상당한 충격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일화가 이래저래 알려지는 과정에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 아니라, 한국에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들여와 알린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게 알맞다.

더 나아가 우장춘의 '씨없는 수박'은 과학의 권능을 보여주는 기적의 현현이자 한국 과학기술의 세계성을 증거하는 국가신화의 상징이라고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일화

우장춘이 사람들의 큰 환영을 받으며 부산항으로 환국했던 당시에 김병규 위원장은 "우리는 우장춘을 대마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며 그의 귀환을 뜨겁게 반겼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돌아와 주셔서 고맙소"라는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우장춘은 "그동안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 못지않게 일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이 나라에 뼈를 묻겠다"며 귀환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그의 정체성이 바뀌게 되는 시점이자, 우장춘의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는 순간이다.

그가 생애 막바지를 한국에서 보냈던 시기는 이승만 정부 시절이기도 했는데, 정치인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도리어 냉대를 받기까지 했다. 일단 출신부터가 한일 혼혈인데다 그 아버지는 상기한 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우범선이었다. 게다가 일본에 오랜 시간 있었던 데다, 본인이 언어를 습득하는 것보다 연구를 중요시했기에 한국어가 간단한 읽기나 듣기만 가능했을 정도로 서툴렀고, 이 때문에 단지 한국어를 못한다고 무시하는 정치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감싸준 사람이 뜻밖에도 이승만이었다. 일례로 그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의하거나, 상기한 이유로 그를 개무시하며 연구 예산을 제공하지 않으려던 농림부 장관에게, "자네는 젊은데 벌써부터 노망이 났나?"라며 쪼인트를 까서 우장춘에게 예산을 내어주게 한 적도 있다. 대신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한국사 최초의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점 때문에 우장춘빠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때문에 인근의 여학생들이 연구소 앞에서 대기하다가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는 일화도 있다.

특유의 우직한 성품으로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어서 별명이 '불독'이었다. 게다가 처음 보았을 때는 다소 오만하게 비춰질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었다. 대신 그런만큼 공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성격이어서 주변인들에게 늘 호평을 받았다. 가령, 자신의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연구원들 일부가 6.25 전쟁 발발 후 입대 명령을 받자, 우장춘이 직접 윗선에 연락해서 그들의 군면제를 청탁해서 성사시켰다. 문제는 이 소식을 들은 정치인이나 기타 유력자들이 자기 아들에게도 똑같은 청탁을 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서 살던 이복누나까지 조카를 데려와서 군면제 청탁을 부탁하자 발끈해서 "나라를 위해 쓸 수 있는 재능이 없으면, 그냥 군대 보내십시오."라는 말로 일관하며 쫓아냈다. 그리고 우장춘 덕택에 징병을 면한 연구원들은 대신 그를 따라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밤낮없이 일해야 했다.

우장춘의 연구소에는 우장춘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보수와 근무조건이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일하고 싶었던 사람이 많았다. 그는 차별화된 전문성을 지닌 연구조직을 효과적으로 구성하고 연구 시스템의 세대 전승을 위해 노력하였다. 연구소의 제자들에게 "눈빛이 식물의 잎을 뚫어 그 뒤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연구자는 연구 대상으로 삼은 사물의 상태를 한눈에 꿰뚫어 그 내면까지도 훤히 들여다볼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하면서 오직 후학 양성과 육종 연구에만 몰두한 우장춘은 연구소 책임자임에도 항상 작업복과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생활하여 '고무신 박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현지처'를 두고 살았다는 말이 떠돌지만, 와전이다. 남편과 사별한 어느 중년 여인이 우장춘을 존경하여 그의 우렁각시 노릇을 했고, 우장춘이 일본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재혼을 거부했는데도 계속 그의 살림을 도와주었다. 그래서 이 소문이 바다 건너 아내에게까지 전해지자 아내는 아이들이 독립하면 한국에 와서 같이 살려고 했던 생각을 접었고, 남편의 위독 소식을 듣고 나서야 한국에 와서 임종을 지켰다. 이때 간호사로 위장해서 우장춘과 면회했는데,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간의 묵은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냥 살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였을 뿐인데 일본에서는 현지처로 와전되어버렸다고 한다.

우장춘이 아직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에 그의 어머니인 사카이 나카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중히 여겨서, 하루는 아들에게 강제로 술을 따라주어서 먹게 했는데, 어머니와 강제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한두 잔 마시고는 그대로 뻗어버린 탓에, 어머니가 대노했다는 일화가 있다. 어지간히도 술을 못 마셨던 모양인데, 그럼에도 대인관계에 힘쓰도록 충고한 어머니의 말을 잊지 않아서, 그가 한국에 정착하고나서는 최소 한 번이라도 서로 인사라도 하라는 의미에서, 연구소에 아침조회는 무조건 참석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사망하기 3일 전에 병상에서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 때 한 말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주는구먼.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장춘은 민족반역자 우범선의 아들이고, 당시 신생 국가였고 전쟁까지 치렀던 대한민국의 어려운 사정상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뒤늦게나마 보상한답시고 포장을 주긴 했으나, 그의 심정이 착잡하긴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평생을 대단한 애국자로 살아 갔던 인물로, 일본에서 성을 바꾸거나 하며 조금만 굽히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버리고 조선, 대한민국, 그리고 한민족이라는 이름 하에 열심히 일한 인물이다. 일본 정부는 우장춘을 대마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설이 돌 정도로 우장춘을 보내기 싫어했다. 만약 자존심을 굽히고 일본에서 생활했으면 상당한 지원을 등에 업고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개인 연구에 투자해 지금보다 학술적으로 개인 경력에서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적으로는 가족과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걸 포기한 것. 게다가 순수 한국인도 아닌 한일 혼혈이고, 일본 태생이기 때문에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우장춘의 어머니가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장춘을 조선인으로 키운 덕택. 심지어 도쿄제대도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유학생 신분으로 진학했다. 이승만이 그를 농림부장관에까지 내정했는데도 과학자로서 묵묵히 일했다. 우장춘이 존경받는 이유에는 이렇게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고 오로지 과학자로서의 연구에만 몰두한 것도 큰 지분을 차지한다.





 기타

그의 업적이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씨 없는 수박의 창시자라는 와전된 사실이 계속 전해지는 데다가, 그에 대한 내용은 고작 책 모퉁이에 짧게 나오는 수준. 오히려 일본에서 우장춘의 연대기를 더 열심히 공부하고 그에 대한 책을 내는 형편이다. 사실 우장춘의 모든 학문적 업적은 일본에서 쌓은 것이며, 한국에서 보낸 마지막 10년 동안은 새로운 학문적 업적 쌓기를 포기하고 한국의 농업 발전을 위한 실험과 육종 사업에만 치중했다. 일본에서 그가 굳이 한국인이라고 밝히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일이다.

그가 남긴 유언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에서 가져온 벼를 손에 쥔 채로 말한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어야 하다니..."였다. 당시 박사는 한 번 심어 두 번 거두는 이기작이 가능한 벼 품종을 개발하고 있었다. 원산지에선 충분히 가능하지만 최소한 당시 한국 기후에선 겨울의 존재로 인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는 2010년대에 들어 전라남도 등지에서 이 방법이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수원시에 있는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인 원예시험장 한 가운데에 흉상이 있다. 거기에 속한 여기산(麗岐山)에는 우 박사의 묘소가 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그 앞 길의 도로명도 우장춘로이다. 귀국 후 근무지인 부산원예고를 기념하는 것이어서 그 동네에 우장춘 이름이 남은 것이다.

그의 넷째 사위가 일본의 전자기기, 세라믹 제품 등을 생산하는 대기업 교세라의 창업회장과 일본항공의 회장을 역임한 이나모리 가즈오다.

1970년대에 나왔던 어린이용 세계 과학자 위인 전집에 우장춘이 들어가 있었다. 90년대 이전 당시의 어린이 도서, 세계 위인전은 대부분이 일본에서 나온 것을 중역하여 해적판으로 낸 것이었는데, 크게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 교과서에도 제대로 안 나온 우장춘은 일본 출신이어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우범선에 대해서도 명성황후 시해의 주동자라는 얘기 없이 "망명 정객"이라고 간단하게 한 줄만 나온다.

1993년에 제작된 초롱이의 옛날여행이란 애니메이션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목소리 연기는 성우 설영범이 맡았으며 근현대의 인물이다 보니 고증은 매우 훌륭한 편. 다만, 주 시청자가 어린이들이다 보니 아버지가 조선인이고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것까지만 언급하고 아버지 우범선이 을미사변의 주동자였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과학기술원 유성캠퍼스에 2016년 준공된 역대 과학자 흉상들 중 우장춘의 흉상을 볼 수 있다.

 


네바다 대학교 임원철 교수가 2022년에 우장춘 박사의 '트라이앵글' 중 마지막 유채인 이디오피아 유채의 유전체 지도를 완성 하였다. 이로써 우장춘의 삼각형 내에 있는 모든 유채의 유전체 지도가 완성 되었다.